무슨 말을 하고 싶었더라. 금산은 한바탕 눈물을 터트리고선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부분기억상실증. 정확한 병명인지는 모른다. 치매는 아니고,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딱 그 부분만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참 이기적이기도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금산의 어깨를 꽉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차라리 나한테 오지...
선생님, 그거 아세요? 저는 항상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 교실 창문을 내다보고 있으면 용기가 샘솟아요. 아, 죽고 싶어서가 아니에요. 날고 싶어서죠. 저는 얼마든지 날아오를 수 있는 사람 같거든요. 지금도, 이 창밖으로 한 발만 내딛는다면 마법이 찾아올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의 근거도 없는데, 정말 가능할 것 같아요. 이게 바로 나의 재능이 아닐까...
누나는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 엄마는 아빠에게 늘 맞고 살았다. 나는 뻔뻔한 아들이었다. 아빠가 내 사랑의 형태에 관해 알게 된 날, 나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골프채가 기어이 머리를 가격했을 즈음,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무너지는 피사의 사탑과, 그 아래에 깔린 나. 엄마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내가 압사하여 불타는 순간에도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
네 이름은 송하다. 석양은 그렇게 말했다. 소나무 밑에서 주워왔거든. 담배를 씹으며 하는 말이었다. 그날은 여름이었고, 폭염 때문에 땀이 줄줄 흘렀고, 만사가 귀찮았어. 그래서 그냥 데려왔다. 말도 못하는 어린애를 주워다가 어디다 써먹으려고. 석양과 말을 트고 지내는 건물주가 그랬다. 그는 음험한 구석이 있었다. 건물주는 석양을 게슴츠레 노려보았다. 애한테...
지하 벙커, 일명 쓰레기장에는 암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나 병자들 말고도 '버려진 사람들'이 오기도 한다. 이들은 종족에 관계없이 보호자들에게 말 그대로 버려졌기 때문에 이곳에 오게 되는데, 그중에선 유독 '델타'가 많다. 델타는 오래 전부터 종족별 제 5계급 중에서 항상 낮은 위치에서 패자처럼 살았다. 심지어 엡실론이 최하층으로 떨어진 지금조차도 델타는 여...
소망은 골똘히 생각했다. 저하라는 호칭이 누구에게 쓰이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저 어리숙한 도련님이 왕실을 배반한 왕자라는 게 납득이 되질 않았다. 차라리 말실수를 해놓고도 태연자약한 남자가 왕자라고 하는 편이 더 믿음이 갔다. 게다가 소망 자신이 유일한 면역인이라는 '정보'라니? 이 또한 여간 의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지금같이 온갖 데이터가 난자하게...
엡실론. 사회적으로 가장 천대받는 종족이지만 실은 가장 축복받은 종족이기도 하다. 그들은 2세기 전만 해도 신의 자식이라 불리며 추대받고, 모든 종족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신체능력이 뛰어난 알파마저도 그들의 앞에선 순순히 무릎을 꿇었다. 물론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리라. 단지 엡실론이 다른 종들에 비해 지나치게 강했기 때문이다. 그들...
소망은 운이 좋은 날을 경계했다. 그런 날은 꼭 한 번씩 엄청난 사고가 일어나기 때문에, 불운이 늘 따라붙는 날이면 외려 안심하곤 했다. 소망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19년간의 경험이 뒷받침하고 있었지만, 완전히 확신하게 된 것은 지난 달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그 날, 항상 지각하던 우유 배달원이 제시각에 왔을 때 소망은 불안에 떨었다. 그리고 배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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